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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유성에 관하여

덕진산성에 대해(펀글)

by 가자유성농장으로 2006. 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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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문화유산답사기 ⑬] 덕진산성 축제의 현장 - 유성구 안산동 산성

 

 덕진산상단. 매년 3월 1일이면 충남 공주시와 연기군, 대전 유성구 주민들이 합동으로 삼일절 기념 행사를 치르는 역사적인 장소다.

 

삼일절에 맞은 안산동 산성축제

 

  삼일절 아침, 유성구 안산동 어둔리 마을 뒤편에 있는 산성에서 산성축제가 열리는 날이다. 대전의 서북쪽, 유성구 지족동을 지나 연기군과 맞닿은 어둔리 마을 입구가 오랜만에 외지사람들로 혼잡하다. 공주시 연기군 유성 등지에서 온 사람들이 두 손에 태극기를 들고 풍물패를 앞장세워 마을 뒷산을 향해 오르기 시작한다. 카메라를 손에 들자 태극기를 들 수 없는 상황을 알아챈 일행이 필자의 등에 맨 배낭에 태극기 두 개를 꽂아준다.

 

  나이가 지긋한 풍물패 단원인 어르신의 숨소리가 거칠어진다. 상쇠의 꽹과리 장단이 점점 빨라진다. 일행들 모두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힐 즈음에야 산성에 도착했다.

  올해로 아홉 번째인 덕진산성제는 공주시와 연기군, 유성구에서 번갈아 행사를 주관하며 세 지역의 주민들이 마음을 모아 함께 치르는 행사다. 산성 하나를 두고 세 지역의 기관과 주민들이 함께 하는 연유는 이 산성의 정상부분 경계선 동쪽은 대전시 유성구, 서쪽은 공주시 반포면이며 북쪽 마을은 연기군 금남면인 까닭이다. 세 지역의 사람들이 삼일절에 모여 일제강점기 선현들이 조국의 독립을 외쳤던 날을 기념하는 동시에, 산신께 제사를 모시고 성밟기 놀이를 통해 우의를 다지는 행사이다.

  성안에 도착하여 신나는 사물소리로 산신께 행사의 시작을 알린 후 올해 행사를 주관한 한근수 유성문화원장을 선두로 풍물패와 참가한 모든 이들이 뒤를 따른다. 긴 행렬이 성벽을 따라 이어지고 필자는 서둘러 서문지로 앞서간다. 천년이 넘는 풍상을 겪고도 이렇게 거의 원형이 보존된 고대산성의 문지가 남아있는 경우는 아주 드문 일이다.

 

 

삼일절 기념 행사 후엔 산신제와 성밟기 행사가 이어진다.

 

삼국시대 축조된 듯

 

  일행들을 마주보는 자리에 올라 서문의 생김새와 쓰임새를 이야기하자 모두들 놀란 표정이다. 아직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정확한 성격이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주변에서 수습되는 토기나 기와조각으로 추정하면 삼국시대에 쌓여진 산성이다. 약 5m 정도 되는 서문지 성벽을 지나 밖에서 성 안을 바라보면 마치 이중, 삼중으로 쌓은 것 같이 보이나, 이는 정상부분 지형의 높낮이를 맞추어 쌓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500여m의 성을 한바퀴 돈 일행들이 제단 앞에 다시 모이자 세 지역의 대표들이 번갈아 만세삼창을 외친다. 참석자들도 두 손에 든 태극기를 높이 들어 만세를 소리 높여 외친다. 온 몸에 소름이 돋는다. 이윽고 모두 땅에 엎드려 절을 하며 산신제를 모신다. 한편에서는 어둔리 마을 사람들이 점심을 마련하느라 분주하고 산성 정상부 건물지에서는 아마추어무선햄 동호인들이 온 세상에 산성제를 중계하고 있다. 제사 마지막엔 참석자 모두가 자신의 기원을 담아 소지를 정성스레 올린다. 혹시나 산불이 염려되어 주변을 둘러보며 모두들 조심 또 조심한다.

 

 

산성축제를 위한 행렬을 인도하는 풍물패(왼쪽)와 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추측되는 안산동 산성(오른쪽)

 

  아까부터 눈독을 들이던 팥떡이 순식간에 동이 나 겨우 바닥에 남은 팥고물 한주먹을 쥐고 돌아서는데 일행 중 한분이 자신의 떡을 냉큼 내 손에 올려주신다. 또 다른 일행이 어디선가 사과를 건네주시니 이제 끼니가 해결되었다. 소리꾼의 구성진 가락에다 이마에서 땀이 흐르는 검술 공연까지 이어진다. 세 지역에서 참석한 사람들이 윷놀이를 펼치는 중에 곁에 분이 필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선생님 성밟기는 왜 하죠?”

기다렸던 질문이다.

“한 바퀴 돌면 다리가 튼튼해지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 하고, 세 바퀴 돌면 극락에 간다는 말 들어보셨지요? 당연히 다리도 튼튼해지고 무병장수할 수 있는 것이지만 여기에는 조상들의 과학정신과 놀이로 승화시키는 지혜가 숨어 있지요.

겨울을 지나 봄이 오면 온도변화로 성벽에 약간의 틈새가 벌어집니다. 방치할 경우 성벽이 붕괴되겠지요. 이때 무거운 돌을 몸에 지니고 성벽을 따라 돌게 되면 다지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는 노역이지요. 그러나 몸도 건강해지고 죽어서 극락세계로 갈 수 있는 놀이라고 생각하고 하면 피곤함도 모르고 성도 튼튼해지니 이거야말로 일석이조 아닐까요? 우리 조상들의 사려 깊은 생각입니다.”

“와! 정말 그렇군요. 그런 깊은 뜻이….”

 

왜 ‘덕진산성제’라 불리는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표기되어 있는 웅진도독부 기록.

  그런데 문제는 산성제의 명칭이 석연치 않다. ‘덕진산성제’라는 명칭이 처음 어떻게 결정되었는지 자세하게 알 수 없지만 개략적인 내용은 이렇다.

그동안 공주시에서는 송곡리산성(반포면), 연기군에서는 용담리산성(금남면), 대전에서는 안산동산성이라 불러왔다. 역사적으로는 조선시대 이후 이 지역은 공주목에 예속되었다가 근대화 이후 대덕군에 편입된 후 다시 대전시에 편입되면서 1990년 대전시에서 기념물 제16호 안산동산성으로 지정하였다. 따라서 현재 공식 명칭은 안산동산성이다.

  덕진현은 유성구 화암동(대덕밸리 IC 앞)과 방현동, 용산동 일대라고 알려져 있으며 향교골 등의 지명이 남아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과 일치한다. 만약 덕진산성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려 한다면 안산동산성의 북쪽 1리에 덕진현이 존재했어야 한다.

  인근 지역의 사람들과 화합을 도모하는 의미에서 공식적인 명칭을 포기하고 ‘덕진산성’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아니면 공식적인 명칭을 되찾아 주어야 할지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O 찾아가는 길

  유성에서 조치원 방향 지족동을 지나 수남리 삼거리 신호등(국방과학연구소) 지나자마자 우측 32사단 표지판을 따라 우측으로 내려가 다시 좌회전(지하도)한 후 직진. 약 1Km 진행하면 좌측으로 안산동산성 표지판을 따라 어둔리마을에 도착함(도로 협소).

마을 앞 끝에서 좌측으로 심하게 꺾인 좁은 도로를 따라 120 m 진행 후 갈림길에서 우측 농로로 100m 넓은 농로에 주차 가능.

진행방향으로 20분 정도 오르면 우측 정상부가 안산동산성.(산성에 올라서자마자 왼편 평지를 따라 200m 가면 서문지가 있고 계속 진행하면 동편에 성벽이 일부 남아있음. 정상부 네모난 평지는 건물지로 추정됨.)

 

덕진현은 공주 동쪽  50리에 위치하며

본래 백제 소비포현이었으나 신라 때

적오현으로 개명되어 비풍군에

속하였고 고려 때 덕진으로 개명된

이름이나 지금은 폐현되었다

유성현은 공주 동쪽  54리에 있으며

본래 백제 노사지현으로 신라때

개명되어 비풍군에 속하였다

고려 때 공주에 예속시켜

지금에 이르렀다

옛 유성은 유성현 동쪽 4리 광도원에

접하였고 객사  향교

창고의 터가 남아있다

덕진산성은 덕진현 남쪽    리에 있고

둘레가  7백  67척이며 안에

우물이 하나 있다

-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 중종 25년 간행)

 


 

이 글과 사진은 한밭문화마당 공동대표이자 대전광역시 문화유산해설사로 우리나라 전지역에 산재한 문화유산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임 헌기님이 취재. 작성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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